조지 카스, 베르테 바일의 초상, 1933, 개인 소장품. Maxime Champion, Delorme & Collin du Bocage.

9월은 전 세계적으로 전시, 아트페어, 경매가 몰려 있는 달이에요. 한국도 키아프, 프리즈 서울, 전국에서 개최되는 비엔날레까지 겹치면서 그야말로 ‘아트 슈퍼위크’가 시작되었죠. 🎨 컬렉터와 갤러리스트, 아티스트들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시기엔 자연스럽게 “갤러리스트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오늘 아트레터에서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현대 미술시장의 판을 처음으로 연 한 명의 전설적인 갤러리스트를 소개하려 해요. 바로 베르트 바일(Berthe Weill).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지금은 거장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을 가장 먼저 발굴해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죠.

왼쪽에 앉은 베르트 바일(1865–1951)

9월의 시작과 함께, 이 거침없던 여성 갤러리스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미술시장의 심장”이 어디서 뛰기 시작했는지 함께 짚어볼까요? 

지참금 4,000프랑(현재 가치 약 1,600만 원). 보통은 결혼 준비에 쓰일 돈이었지만, 베르트 바일은 그걸 12월 1일, 1901년 몽마르트르 근처 빅토르 마세 거리 25번지에 ‘젊음을 위한 자리(=새로운 감수성을 위한 공간 a place for youth)’라는 모토의 조그만 갤러리 문을 여는 데 썼습니다. 🏛 그리고 개장하자마자 벽에 걸린 그림은 스페인에서 올라온 20살의 청년, 파블로 피카소…!

🐂 황소 경기 장면을 그린 파스텔 몇 점. 가격은 싸지만 눈길을 확 붙잡는 그림에 바일은 망설임이 없었어요.
“이건 지금 팔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 여기서 시작돼야 하는 미술이야.”

그 작은 쇼윈도가 피카소의 첫 ‘파리 무대’가 됐습니다. 이듬해엔 초기작 30점을 묶은 전시까지 밀어붙였고, 거기서 바일은 과감히 딜을 성사시켜요. 지금은 구겐하임 소장인 〈물랑 드 라 갈레트〉(c.1900) 한 점을 언론인 겸 컬렉터 아르튀르 위크에게 250프랑에 판매한 것이죠! 당시로선 ‘무명 청년’의 작품에 투자한 셈인데, 바일은 “이건 투기가 아닌 신뢰”라고 단언했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그가 ‘눈먼 행운’이 아니라 ‘지독한 눈’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바일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Blue Period) 문턱에서 그 가능성을 확실히 읽었다고 해요. 그녀는 안경알이 금붕어 어항만큼 두껍다고 묘사될 만큼 투박한 인상을 지녔지만, 보여야 할 것을 먼저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갤러리는 늘 자금난이었지만, 그녀는 안전한 기성 작가로 타협하지 않았고, “우린 모던으로 간다”는 선택을 끝까지 고집했죠.

만약, 바일이 먼저 문을 열지 않았다면 ‘피카소의 첫 장면’은 훨씬 늦게 재생됐을 거예요. 누군가가 가진 처음 한 번의 믿음이 역사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바일은 그 답을 작은 쇼윈도와 몇 장의 파스텔로 보여줬습니다. 💥

1902년, 아직 그림 한 점 팔기도 버거운 무명 화가 앙리 마티스. 그를 처음으로 갤러리 벽에 걸어준 사람도 바로 베르트 바일이었습니다. 컬러의 규칙을 깨고, 정물조차 강렬한 색면으로 뒤흔들던 작품이었죠. 바일은 그것이 낯설고 투박해 보여도 “앞으로 세상을 바꿀 그림”이라고 여겼어요. 당시 미술 시장은 여전히 인상주의의 여운 속에 있었고,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와 낯선 구성이란 모험에 선뜻 투자할 이는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바일은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마티스의 정물화를 130프랑에 판매하며, 기록상 딜러를 통한 그의 첫 판매를 성사시켰습니다. 그 작은 거래가 훗날 색채의 혁명을 일으킨 거장의 출발점이 된 셈이죠. 이후 1908–09년엔 야수파 작가들을 잇달아 전시하며 파리의 색채 감각을 통째로 흔들었습니다. 바일의 선택은 늘 빠르고, 과감했고, 무엇보다 미래 편이었어요. 🌈

재미있는 뒷이야기도 있어요. 같은 시기, 바일은 갤러리에 자주 드나들던 스테인 남매(레오, 거트루드)에게도 이렇게 권했어요.
“믿어봐요, 마티스를 사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스테인 남매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고, 결국 마티스가 이름을 알린 몇 년 뒤에야 뒤늦게 그의 대표 컬렉터가 되었습니다.

이 일화는 바일의 눈이 얼마나 빨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줘요. 사람들은 아직 ‘가치’를 보지 못했을 때, 바일은 이미 작품 속에서 시대의 전환점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구겐하임이나 테이트에 걸린 마티스의 대작들도 사실은 이 “130프랑의 첫 거래”에서부터 길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대 파리는 “여성 작가=부차적”이라는 편견이 공기처럼 떠다니던 도시였습니다. 그 공기를 바꿔버린 사람이 바로 베르트 바일. 그녀는 신인 발견가이자 “여성을 전면에 세운 최초의 딜러”였죠. 

바일의 방식은 단순했어요. 실력과 개성. 성별은 기준이 아니었고, “그림에서 작가의 에너지와 태도가 보이는가”만 물었죠. 그래서 수잔 발라동, 마리 로랑생, 에밀리 샤르미, 자클린 마르발, 에르민 다비드 같은 이름들이 그의 쇼윈도에 걸렸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바일이 연 전시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여성 작가를 포함했고, 경력 중반엔 절반 가까이를 여성에게 할애하기도 했다고 해요. 당시로선 매우 급진적인 배치였죠. 👩‍🎨

그녀는 콜렉터의 안심 대신 작가의 편에 섰습니다. “그림을 주식처럼 보지 말라”는 그녀의 신념은 초보 컬렉터들에게는 버거웠지만, 여성 작가들에게는 든든한 방패였죠. 바일은 “충분히 믿을 준비가 안 된” 손님은 돌려보내고, 대신 작품값을 낮춰서라도 작가에게 기회를 연결했어요. 덕분에 여성 작가들은 살롱의 외면을 우회해 시장과 평단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었고, 훗날 많은 이들이 “첫 판매는 바일에게서 시작됐다”는 고백을 남겼습니다.

물론 대가는 컸습니다. 여성 작가의 시장은 좁았고, 바일에 의해 빛을 본 작가들이 더 큰 자본을 가진 갤러리로 옮겨가면 그녀의 재정은 늘 위태로웠죠. 그래도 바일은 ‘안전한 이름’으로 타협하지 않았고, 명함에 새긴 모토(젊음을 위한 장소)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결국 바일이 만든 건 ‘여성도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규범의 업데이트였어요. 오늘날 미술시장을 바라보면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우리의 쇼윈도에는 누가 세워지고 있나요? ✨

1917년 12월, 파리. 바일의 갤러리 쇼윈도에 모딜리아니의 누드 연작이 걸리자, 거리는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음모가 가려지지 않은 채 보였다는 이유로, 당시 파리 경찰은 전시장을 급습해 “저 더러운 것들을 치워라”라며 작품 철거를 명령했죠.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했던 바일은 “감식안 있는 이들은 다르게 보더군요”라고 맞받아치며 완강히 거부, 결국 경찰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습니다. 그녀가 버티는 동안, 창밖에는 ‘도대체 무슨 그림이길래?’ 하고 몰려든 사람들이 창을 가득 메웠고, 그 일대 교통이 마비되어 말 그대로 예술이 도시를 멈춰 세운 순간이었어요. 🚨

결국 바일은 임시로 쇼윈도에서 작품을 안쪽으로 옮기는 타협을 하고 전시는 계속됐지만, 이 사건은 몇 가지를 선명하게 남겼습니다.

이 에피소드 하나 만으로도 바일이 왜 “초기 모더니즘의 실질적 가속페달”이라 불리는지, 충분히 설명됩니다.

사실 그녀는 스스로를 “형편없는 사업가”라 했고, 남들은 그녀를 “가시 돋친 성격의 작은 여자”라 불렀어요. 맞아요, 바일은 예쁨 대신 날카로운 눈을, 안정 대신 예술가에 대한 신뢰를 택했죠. 전쟁과 반유대주의 속에 기록조차 남기기 어려웠지만, 1946년, 그녀에게 빚진 화가·딜러들이 작품 80여 점을 내어 그녀를 위한 구제 경매를 열었고, 1948년 그녀는 프랑스 국가훈장을 받았습니다. 바일이 자서전에 남긴 한 줄을 마지막에 붙여둘게요.

현대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종종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이것도 예술일까?”

저널리스트 비앙카 보스커는 바로 그 물음에서 출발해, 뉴욕 동시대 예술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갤러리의 막내 직원에서 시작해 마이애미 아트페어 판매원, 신진 작가의 조수, 그리고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까지. 그녀는 업계의 냉소와 배타성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탐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예술계를 단순히 폭로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보스커는 화려하지만 종종 허세 가득한 ‘아트 월드’를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작품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관객의 순간과 예술가들의 고독한 창작 과정을 기록합니다. 이 양가적 시선이야말로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느껴졌어요.

이 책은 결국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 왜 우리는 작품 앞에 서서 감동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가?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는 그 답을 전문가의 해석이 아닌, ‘보는 이 모두의 경험’ 속에서 찾아냅니다. 현대 미술을 어렵게만 느껴온 독자에게는 가장 친근한 길잡이가 되고, 이미 미술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가 되어줍니다.

책을 덮고 나면, 미술관의 난해한 작품 앞에서 더는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 거예요. 오히려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을 바라보는 가장 풍요로운 출발점임을 깨닫게 되니까요.

📖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비앙카 보스커
🔖 RHK(@rhkorea_books)
🏷️ 23,000원